이종희 제주한라대학 교수

▲ 이종희 제주한라대학교수

나이 마흔에 얻은 늦둥이가 있다. 쉽지 않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쉽지 않게 얻은 아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감사했고 예쁘게 자라줘서 또 감사했다. 남편은 아이가 어릴 때 첫 손주 본 할아버지 마인드로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실을 늘 기웃거려 선생님들에게 민망할 정도였고 지금도 주위에 ‘딸바보’로 유명하다. 반면 나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찾아 온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행여 부정한 기운이라도 탈까봐 일부러 ‘똥강아지’라고 부르며 애지중지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

이 아이가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이다. ‘중2병’을 능가할 정도로 무섭다는 ‘초4병’의 시기인 것이다. 퇴근하면 “엄마!”하고 활짝 웃으며 달려와 가슴에 폭 안기던 아이가 이제는 전자 기기에 코를 박고 건성으로 ‘다녀오셨어요.’한다. 집 앞 마트에 잠깐 다녀올 때도 손 꼭 잡고 종종걸음으로 종알종알 하루 일과를 얘기해 주던 아이가 “내가 꼭 같이 가야해?”라며 귀찮아한다. 엄마에게 이 정도이니 아빠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뽀뽀가 비싸진 건 물론이고 왜 아직도 담배를 못 끊느냐며 사뭇 진지하게 핀잔을 준다. 막둥이를 물고 빨고 하는 낙에 살던 남편은 처음 변화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자식, 많이 컸네!”하며 웃어줄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막둥이의 변화에 서운함과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초4병’에 대한 진단은 다양하다. 예전보다 아이들의 성숙이 빨라져서 그렇다고도 하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학업에 대한 부담이 커지면서 스트레스가 많아져 그렇다고 하기도 한다. ‘실컷 놀면 나중에 공부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겠지.’하며 최대한 열심히 놀리고 있는 우리 집의 상황을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에 원인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엄마, 내가 기분이 왜 이렇게 금방금방 바뀌지? 변덕쟁이가 되려나 봐.”라며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호르몬이라는 놈이 아이의 몸 안에서 대단한 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아이는 앞으로 다가올 여러 신체적 변화도 받아들여야 한다. 성장기에 겪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바라보는 부모는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또한 두렵기도 하다. 아이에게 ‘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미숙하고, 공부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데 우리 아이도 무한 경쟁의 사교육 대열에 합류시켜야 할지 대답을 찾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이는 들쑥날쑥 기분처럼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엄마는 진짜 자기를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하는 마음으로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가 자신을 키우는 게 힘들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지는 않아서란다.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자기를 키우는 게 더 행복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말에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이가 한 인격체로 자라나는 중요한 성장기의 변화를 축복과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버거움과 아쉬움으로 바라본 것을 들키고 만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부모 중에 행복으로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과연 몇이나 될까? 특히 사춘기에 들어서는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 중에 학업 성적과 무관하게 아이를 온전히 지지해 줄 수 있는 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상을 스스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잊고 아이의 성장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너무 앞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주에 만 열 살의 생일을 맞이한 아이는 솜털같이 부드럽고 몰랑한 허물을 벗고 이제 비약할 단단한 날개를 준비하며 엄마가 행복한 어른으로 살기를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알록달록 머리 방울을 졸업하고 언니들이 묶는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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