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677조4000억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을 발표했다. 올해보다 3.2%만 늘릴 정도로 허리띠를 바짝 조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을 재정준칙 한도(3%) 내인 2.9%로 맞추겠다고 한다. 예산 총지출 증가율이 문재인 정부 때의 연평균 예산증가율(8.7%)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은 물론, 물가를 반영한 내년 경상성장률 전망치(4.5%)보다도 낮다. 강도 높은 긴축 재정이다.
정부 발표에 따르면 내년 예산안은 민생과제를 집중지원 했으며, 미래 도약을 위한 우리 경제의 경쟁력 제고와 사회구조 개혁에도 중점을 뒀다고 한다. 이를 위해 ▲맞춤형 약자복지 ▲경제활력 확산 ▲미래 대비 체질개선 ▲안전한 사회 등 4대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당면한 민생과 경제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관행적·비효율적 사업은 과감히 축소하는 지출 효율화를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우선 생계급여를 3년 연속 최대 폭으로 인상하고, 공공주택 공급확대, 기초연금 상향 등이 눈에 띈다. 지난해 대폭 줄인 연구개발(R&D) 예산도 11.8% 늘어난 30조원으로 책정했다. 의료 개혁에 10조 원의 재정이 처음 투입되는 점도 주목된다. 5년간 전공의 수련 국가지원, 지역필수의사제 도입,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에 투입된다.
이 밖에도 각종 복지의 기준선이 되는 기준 중위소득을 역대 최대폭(6.42%)으로 올렸다. 기존의 복지정책 전달 수단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핀셋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정책은 무차별 현금 뿌리기보다 훨씬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이다.
건전재정 의지 높이 평가…의무지출도 손 봐야
솔직히 지금 우리 경제 현실은 어둡다. 우선 내수가 좋지 않다. 불황일수록 재정을 더 투입해 경기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만하다. ‘건전재정의 덫’에 갇혔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경기를 방어하는 재정의 역할과 재정 건전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말은 원칙적으로 옳지만, 실제 정책 현장에서 재정의 역할을 강조하다 보면 재정 건전성을 일시적으로 지키지 못할 정도를 넘어 아예 상당 기간 재정 건전성과 결별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윤 대통령이 국가 채무를 언급하면서 ‘전 정부 탓’을 한 것은 유쾌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재정을 만들려면 더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선심성 재정 정책을 지양하고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출도 손볼 때가 됐다. 연금 지출·국채이자·지방교부세·지방 교육재정교부금 등 고정비처럼 빠져나가는 의무지출은 전체 재정지출에서 올해 52.9%를 차지해 5년간 연 5.7%씩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여기서 비효율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학령인구 감소 와중에 내국세의 20.79%가 무조건 할당돼 내년에 총 72조 원이 넘는 지방 교육재정교부금은 개편 ‘0순위’가 돼야 한다.
경제활력 등 경기 마중물 역할도 고민해야
세수(稅收)가 줄어 총지출을 늘릴 수 없다면 씀씀이를 구조조정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고강도 긴축이 자칫 경기 대응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 경제는 반도체 업황 회복으로 수출은 겨우 호조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고금리·고물가, 실질임금 감소 등으로 내수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게다가 가계부채 급증세로 통화정책 운신의 폭도 좁아지고 있다.
시장 경제가 빡빡하게 돌아가면 정부 재정이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출이 적어진다. 내수가 살아나야 세금도 더 걷을 수 있는데, 내년 경제성장률 둔화(鈍化)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긴축 재정이 정답인지에 대해 회의론도 제기된다. 대표적 내수 진작(振作) 예산인 사회간접자본 지출은 25조 5000억원으로 오히려 올해보다 3.6% 줄었다. 서울 집값 급등과 가계 대출 문제로 한국은행이 금리 인하에 우려를 표하면서 재정지출에 대한 기대감은 더 커진 상황이다.
경기를 살리는 특별 대책이 필요한 상황인데, 경기를 살리는 정책 수단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정책 여력이 없을 때일수록 규제 혁파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규제는 감춰진 세금이다. 간단한 규제 하나를 지키는 데도 국민의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감춰진 규제를 찾아내 없애면 기업 환경이 좋아지고 투자와 일자리가 늘어난다. 내년에는 규제와의 전쟁에 나서야 한다.
내년 국세 수입 전망치 높아, 우려 큰 것은 사실
한편 내년도 국세 수입 예산은 올해 예산 367조 원 대비 15조 원 증가한 382조 원으로 편성됐다. 기획재정부의 ‘2025년 국세 수입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 국세 수입 예산안의 주요 세목별 세부내용에서 소득세는 2024년 예산대비 2조2000억원, 부가가치세도 민간소비 증가와 수입확대 등에 따라 2024년 예산대비 6조6000억원(8.1%) 증가한 88조 원이 전망되고 있다. 법인세도 2024년 기업실적 호조 등에 따라 2024년 예산대비 약 11조 원(14%) 증가한 88조5000억원이 징수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대규모 세수결손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내년 국세 수입 규모를 올해 예산보다 15조 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 것은 지나치다”라는 지적도 많다. 특히 2024년 올해 세수결손 규모가 15조 원에서 최대 30조 원까지 예상되는 상황인데, 이러한 예측을 바탕으로 가정하면 내년 예산은 올해 실적보다 30~45조 원까지 더 걷혀야 하므로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법인세수를 내년에 88.5조 원으로 전망한 것을 두고, 가계의 부채는 높아지고 실질소득은 줄어든 상황에 기업실적 호조 요인이 불투명하니 조심스럽다. 해답은 경기를 하루 속히 되살리는 것이다. 지금 되살아나는 경기를 규제철폐와 기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산심의는 국회 몫…제대로 해야 한다
이제 곧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해 22대 국회 첫 예산심의가 시작될 것이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소속 국회의원 50명이 9월부터 12월 2일까지 3개월간 심의한다. 정부가 전문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예산안을 과연 22대 국회 새내기 의원들이 잘해 낼 수 있을까? 21대 국회 때까지 예결위가 보여준 관행을 보면, 정치 공방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법정 시한 임박해서 자신들 지역구 예산이나 챙기는 데 급급하다가, 법정 시한을 넘겨 간신히 통과시킬 게 뻔하다. 이번 22대 국회는 제발 달라지기를 기대하면서 몇 가지 주문을 해본다.
먼저, 전년 대비 예산증가율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정부 예산안이 국회로 가면 이 예산안의 전년 대비 증가율이 내년도 성장률 예측에 비해 큰지 작은지 갖고 논란이 벌어지곤 했다. 성장률보다 예산증가율이 높으면 팽창예산이고 아니면 긴축예산이라고 하면서 공방을 벌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전년 대비 증가율을 갖고 벌이는 공방은 그 다음 해 가서 추경이 편성되고 나면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또, 9월 한 달간 이뤄지는 결산심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전체 예산증가율과 함께 각 예산 항목들도 전년 대비 증가율에 모든 의원의 관심이 집중되는데 이때 결산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한번 시작된 예산은 원래 목적을 제대로 달성했는지를 검증하는 결산 심사과정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전년 대비 얼마나 증가하는가에만 예산심의의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다 보면 한번 시작된 예산은 멈춰지는 일은 없고 앞으로 더 늘어가는 일만 남는다. 이번 22대 국회에서는 2023년 결산심사부터 철저히 해서 문제가 발견되면 항목 자체를 없애는 것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은 조세지출과 재정지출을 동시에 보는 예산심의와 결산심사가 이뤄져야 한다. 같은 대상에 대해 지원을 하는 정책 수단은 크게 세금을 감면하거나 예산을 지원하는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는 조세감면 즉 조세지출로, 후자는 재정지출로 이뤄지는데 이에 대한 효과는 대상별로, 상황별로 다를 것이다.
따라서 조세지출과 재정지출의 효과를 통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평가를 기초로 예산안도 조세지출과 재정지출을 살펴봐야 한다.
끝으로 국가재정법을 기초로 중장기적 계획에 따라 예산안을 만들고 평가해야 한다. 정부가 예산안을 제출할 때 5년 단위 국가재정 운용계획을 함께 제출한다. 그런데 국회에서 심의하면서 이러한 중기 재정계획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내년도 예산안이 국가재정 운용계획에 비추어 볼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중장기 조세정책을 기초로 예산안 심의가 이뤄지는 것은 더더욱 사례가 없었다.
국회에서 이 모든 과제를 해내기에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긴 안목을 갖고 국민적 관심하에서 국회가 나라 살림을 제대로 챙기도록 심사하고 감독해야 한다. 22대 국회의 예산심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납세자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 국세청 국장 명예퇴직
• 세무사(세무법인 정담 대표)
• 경영학박사
• 수필가
• 가천대 대학원 겸임교수
• 서울세무사회 자문위원장
• (사)건강사회운동본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