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제22대 국회 원 구성과 함께 세법을 비롯한 본격적인 입법 일정이 시작된 가운데 이번 주 경제계가 국회 입법 없이도 가능한 61개 정책개선 과제를 정부에 건의했다. 시급한 현안인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세제지원과 대규모 기업 투자를 지원하는 내용이 골자다.
전쟁 수준의 글로벌 경쟁에서 각국이 핵심기술과 산업에 대해 국가차원의 파격적인 지원을 선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뛰겠다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데다 정부가 마련한 법안은 여의도로 들어서는 순간 ‘실종’ 수순을 밟는 절박한 반복을 체험한 기업들이 아예 “법 말고, 하위 규정으로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심도 있게 토론하고 검토해서 당당하게 입법하고, 신속하게 세부 시행방안까지 체계적 제도로 만드는 것이 정부와 정치의 몫이고 임무다. 그러나 이 당연한 일이 불가능한 현실을 두고 경제계는 급한 대로 입법 포기하고 하위법령으로라도 일단 가자는 호소를 하고 있다. 배경에는 물론 불신과 불확실성이 짙게 깔려 있다.
7월 세법개정 시즌이 다가왔다. 보통 이 시기면 조세관련 정책토론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전문가와 납세기업, 정부 당국자가 참석하는 치열한 토론회가 이어지지만 올해는 눈치만 난무한 채 분위기가 삭막하다 못해 아예 조용하다. 세법개정 시즌에 세(稅)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조세정책을 주관하는 세법개정 실무 부서인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요즘 출입을 아예 폐쇄하다시피하고 있다. 정부 정책 최종단계에서의 보안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올 상황은 보안 수준을 넘어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담당직원이 아니면 세제실 내부에서조차 출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세제실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요즘 세금문제는 단순한 조세정책의 범위를 넘어섰다. 따라서 그동안 조세제도를 운용하던 공식적인 절차와 과정이 전혀 작동되지 않는다. 정부 정책방향에다 납세자와 납세기업의 의견과 건의를 수렴해 검토하고, 전문가 회의 등을 거쳐 정부안을 마련한 뒤 국회에서 입법으로 확정짓던 절차는 일단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됐다.
국민의 삶과 밀접한 세금을 다루는 조세정책은 이제 정치 프레임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정부 여당과 야대 국회가 대립하면서 조세정책이 정쟁의 한 가운데 서게 된 것이고 정치가 삼켜버린 결과가 됐다.
국민적 요구에 따라 야당도 공감하던 조세정책이 정부 여당 주도로 추진되면 곧바로 반대 프레임이 작동한다. ‘부자감세’는 ‘만능검(萬能劒)’이 됐다. 경제 양극화 현실에서 프레임의 주도권은 한발 먼저, 쉽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야당이 쥐는 형국이다.
골 깊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 여당과 초거대 야당의 갈등이 상수(常數)로 고착되면서 방법을 찾기 어렵게 됐다. 그 대립과 갈등의 상황 3년차 반복이 오늘이다.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 올 세법개정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러설 수 없는 절박함이 목전에 있기 때문이다.
윤 정부는 출범 첫해 부동산·기업정책 등 전임 文정부의 실정을 바로잡고 시급한 대선 공약을 실천한다며 친기업 ‘경제 활력’ 정책을 내세웠다. 법인세율 3% 인하를 비롯해 기업·부동산 등 관련 세금을 대폭 완화하는 세법개정안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풀기 빳빳하게 출범한 윤 정부는 준비 부족 상태였지만 화급한 경제 상황을 내세우며 ‘국민의 선택’으로 밀어붙였고 그해 세법개정안은 연말까지 국회를 뜨겁게 달궜다. 사생결단의 기세로 야당과 대립했지만 결과는 겨우 ‘법인세율 1%인하’로 시늉만 낸 채 패퇴했다.
이후 국회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한 윤 정부 핵심 입법은 결국 2024년 총선 이후로 대거 미뤄지는 분위기였고 지난해는 결과를 못내는 허망한 시간을 속절없이 보냈다. ‘국가의 명운이 걸렸다’며 학수고대하고 치른 올 4월 총선에서의 결과는 더 악화된 결말로 나왔다.
문제는 올해가 윤 정부 출범 3년차로 핵심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점이다. 세법만 하더라도 올해 핵심이슈를 개선하지 못하면 윤 정부에서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3년차는 레임덕이 아른거리는 시기다.
그러나 올 세법개정 상황과 분위기는 핵심이슈의 개혁은 고사하고, 화급한 사안조차 논의가 어려운 형편이다. 여야가 공감하며 궤를 같이 하는 듯했던 상속세·종부세 개선도 정부 여당이 운을 떼자 거대 야당의 분위기가 ‘확’ 돌아섰다. 초강력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세법의 ‘산부인과’는 결국 국회다. 진료거부 수준으로 작동이 멈춘 거대하기만한 이 병원에서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노력마저 부재한 정부, ‘반대 맨’ 야당이 과연 국민을 위한 개정세법을 순산할 수 있겠나. 세금 내는 국민 보기가 민망하다.
Ⅱ
조세정책이 국민적 공감이라는 뿌리를 내리자 못한 채 몇 년 째 이어지면서 납세자들의 조세정책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비교적 목소리를 내지 않던 고소득층의 불만은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다. 납세의 토양과 기반이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다.
우리나라 고소득층은 소득세, 상속세, 재산세 측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세금 부담을 하고 있다. 주요 세목의 세수는 상위 10% 몫이 절대적이다. 그런데도 부자 세금 얘기만 나오면 ‘더 내야 한다’는 함성이 커진다. 다른 나라보다 세금을 훨씬 더 내고 있는데도 존경은 고사하고 늘 원망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다. 소득세의 경우 세금을 아예 내지 않은 과세 미달자가 37%에 이르지만 ‘세부담 불평등’은 늘 고소득층으로 쏠린다.
중산층 세부담도 만만치 않다. 과세기준은 그대로 둔 채 경제가 성장하고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 국민이 체감하는 세금 부담은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조세제도에 대한 의문이 들고 신뢰 문제로 이어진다.
상속세·종부세는 현실에 맞지 않거나 방치해 온 세법을 개정하자는 것인데 이마저도 정치 프레임에 갇히고 있다. 두 번 상속하면 회사가 사라지고 웬만한 집 한 채 가진 국민은 생전 종부세, 사후 상속세 대상이 된다. 현실을 세법에 반영하자는 주장이다.
상속세·종부세는 올 세법개정 대상 중 지극히 일부다. 먼저 쟁점이 됐을 뿐이다. 이보다 화급한 국가·민생 차원의 현안이 수두룩하다. 경제현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SOS’ 신호가 울린다. 해마다 책 한 권 분량의 세법개정안을 내놓고도 늘 ‘다음에 또...’가 되풀이 되는 게 세법이다. 경제 상황과 세금을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연계하는 노력이 곧 민생이다.
충분한 설명과 설득이 전제되고 국민이 납득한다면 정책과 제도는 유지된다. 그러나 일방으로 치닫고 외면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존재의 의미에다 곧 신뢰문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세금은 신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 때는 여·야의 의미도 필요 없다.
Ⅲ
세제실도 문만 걸어 잠글 일이 아니다. 차려 내는 밥상마다 매번 뒤집어 진다면 방법을 찾아야한다. 조세정책 컨트롤 타워로 인정받으려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 한다. 법안 진행이 좌절될 때마다 “야당이 반대해서 안됐다”는 이유는 이제 국민적 설득력이 없고 현실에도 맞지 않는다. 징징대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법안 진행의 핵심 열쇠를 야당이 쥐고 있다면 국민과 경제를 전제로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소통하고 설득해서 동의를 얻어야 한다. 결과를 국민 앞에 내 놓아야 한다. 국민과 우리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면 “돼야 한다”고 믿고 방법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게 일하는 것이다.
거대 야당도 민생과 직결되고 국민적 신뢰를 좌우하는 조세정책을 정쟁의 틀 안에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정치적 쟁점과 세법을 연계해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작전에 대해 국민은 이제 식상해 하고, 결정적으로 ‘화’내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세법에 씌우는 정치 프레임은 그대로 정치적 신뢰와도 연결될 것이다.
특별한 분위기 반전이 없는 한 내달 정부 세법개정안이 발표되면 벌어질 장면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된다. 만약 우려하는 일이 현실로 된다면 국민이 불행해 지는 것이고, 경제가 타격을 입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국민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멀쩡한 ‘법(法)의 길’을 두고 시행령 샛길로라도 가자고 읍소하고 호소하는 국민과 납세자가 불쌍하지도 않나.
이제 정부 여당과 초거대 야당이 답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린 올 세법개정의 진정한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