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가(家)의 상속 소송 재판 과정에서 이번 소송을 제기한 세 모녀 측의 '경영권 참여' 의도가 드러나는 등 LG가의 법정 공방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법정에서 가족 간 녹취록이 처음 공개된 가운데 그간 재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고(故)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치매 병력까지 소환되며 재계 일각에서는 "선을 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17일 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전날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2차 변론기일에서는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고 구본무 선대회장의 부인 김영식 여사, 장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등의 대화를 녹음한 내용이 공개됐다.
이는 작년 세 모녀가 소송 제기에 앞서 상속 분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던 시점에 녹음한 것이다.
녹취록에 따르면 김 여사는 "우리가 지분을 찾아오지 않는 이상 주주간담회에 낄 수 없다. 연경이가 아빠(고 구본무 선대회장) 닮아서 전문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연경이나 내가 자신 있게 잘 할 수 있다. 다시 지분을 좀 받고 싶다. 경영권 참여를 위해 지분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소송을 제기한 의도가 사실상 경영 참여임을 밝힌 셈이다.
앞서 작년 소송 당시 세 모녀 측은 "구 회장이 (㈜LG 주식을) 모두 상속받는다는 유언장이 있는 것으로 속았다"며 "(소송이) 경영권 분쟁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으나, 이에 앞서 이미 가족 간 대화 당시에는 경영권 참여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전까지는 유언장 존재 여부를 두고 양측이 공방을 벌였으나, 녹취록을 통해 세 모녀가 가족 간 상속 합의를 인정했다가 이를 번복하려는 정황도 드러났다.
김 여사는 "내가 (구광모 회장에게) 주식을 확실히 준다고 했다"며 가족 간 합의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고, 구연경 대표는 "아빠(구 선대회장)의 유지와 상관없이 분할 합의는 리셋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합의 번복 의사를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녹취록에는 증인으로 출석한 하범종 ㈜LG 경영지원부문장(사장) 외에 '대화자'로 구연경 대표의 남편인 윤관 블루런벤처스 대표도 등장한다.
소송 제기 당시 재계 일각에서 윤 대표가 이번 소송에 깊게 관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던 만큼 향후 재판 과정에서 윤 대표의 소송 개입 여부 등이 밝혀질지도 관전 포인트다.
한편, 재계에서는 LG가의 전통인 '장자 승계 원칙'과 또 다른 유언장 존재 가능성 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족 내부의 비밀이 법률대리인의 입을 통해 알려지며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번 재판에서 원고 측은 하 사장에게 "구자경 명예회장이 치매 때문에 언제부터 제대로 의사소통이 안 됐냐"고 따져 물으며 LG가의 암묵적 비밀이었던 구 명예회장의 치매 병력을 끄집어냈다.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2018년 아들인 구본무 선대회장의 별세 당시 치매로 요양 중이어서 가족들이 구 선대회장의 별세를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원고 측이 구 명예회장의 '장자 승계 원칙'과 보유 주식 상속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법정에서 고인의 치매 사실을 공공연하게 밝힌 셈이다.
이에 대해 하 사장은 "'구광모가 장차 회장이 돼야 한다. 충분한 지분을 가져야 한다. 내 지분은 장자에게 가야 한다'는 취지로 늘 말씀하셨다"며 "다른 자녀들도 아무 반발 없이 합의했고,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의 오랜 뜻이 관철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보유했던 ㈜LG 주식 164만8천887주(0.96%)는 구 명예회장 별세 후인 2020년 6월 구광모 회장이 상속받았다.
구 선대회장의 유언장 존재 여부 등을 캐묻는 과정에서도 고인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만한 상황이 연출됐다.
원고 측은 구 회장의 친부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구 선대회장의 금고를 연 사실을 언급하며 금고 속 물품에 대해 물었다. 이에 하 사장은 "개인적인 건데 중요한 것은 아니어서 법정에서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답했으나, 원고 측이 거듭 공개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지켜보던 재판장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라며 저지하기도 했다.
이 밖에 원고 측이 "곤지암은 (구 선대회장이) 별장처럼 이용한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언급해 하 사장이 "이는 망인의 명예와 관련된 것"이라며 "곤지암은 철저하게 공적으로 사용했다. 해외에서 회장들이 오거나 국내에서 중요한 분들과 대화하실 때 사용한 공간이고 공간 자체가 회사 재산"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굳이 치매 병력이나 금고 내 개인 물품까지 공개된 법정에서 얘기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라며 "자칫 소송의 본질이 흐려지고 가십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