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한일 양국이 1998년 10월에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6일 정부가 밝힌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을 국내 기업 돈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의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입장 발표문’의 끝부분이다. 일본 가해 기업들의 배상 참여나 사과가 전제되지 않은 채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굴욕적인 방안을 내놓은 것도 동의할 수 없지만, 몇 번을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 주체가 ‘정부’인지, ‘한일 양국’인지도 불분명하고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이해불가다.
문장을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윤석열 정부’가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국가에게 관계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라고 당부하는 꼴인데 해괴하다. 졸속 정도를 넘는 아주 요상한 국어 문법이다. 소위 수재들이 모여 있다는 외교부의 발표문이 이런 식이라니. 대통령의 의중을 담느라 그랬겠지만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발표문은 앞부분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강제징용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국내적 의견 수렴 및 대일 협의 결과 등을 바탕으로 대법원 판결을 무시한 방안을 낼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끝부분은 해독이 상당히 어렵지만 ‘우리가 이런 굴욕적 해법을 제시했으니 일본 너희도 앞으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달라’는 말을 비비꼬고, 에둘러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강제동원 관련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내놓은 굴욕적 ‘해법’의 참담함을 넘어 앞으로의 대일 관계가 더욱 굴욕적일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떻게 표기해야 했을까.
“일본은 1998년 10월에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중략) ~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 정도로라도 표현해야 맞지 않을까.
그렇게도 자신감이 없는가. 이래놓고도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강제징용 해법이 “피해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과 미래 발전에 부합하는 방안을 모색해온 결과”라고 말했다. “국력에 걸맞은 대승적 결단”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는 궤변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2차 가해를 가하는 것이 과연 정부가 할 짓인가.
미쓰비시와 일본제철 등 가해 기업이 아닌 청구권자금 수혜 기업이라며 포스코 등 국내기업을 동원해 대법원 판결금을 지급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주도의 해결책’인가. 이쯤 되면 논리 비약이 도를 넘었다. 차라리 청구권 자금이 투입됐으니 ‘포스코는 일본 기업’이라고 말하는 게 더 솔직할 듯싶다. 대일청구권과 강제징용 배상금은 별개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그렇게 판결했다.
일본의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굴욕적인 강제징용 해법 발표도 어처구니없지만 정부의 이런 자세는 향후 대일 외교가 계속 종속적으로 갈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어서 걱정이다.
마지막 문장도 주체가 불분명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궤변이기는 마찬가지다.
“정부는 ~ (중략) ~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함께~”라고 했다. 강제동원을 부인하고 사과조차 않는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나란히 ‘인권’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 ‘법치’를 주구장창 내뱉었던 정부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대법원 판결을 깡그리 짓밟고 이제 와서 ‘보편적 가치’ 운운하는 것도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다.
피해자인 자국민이 아닌 가해 기업과 가해국의 주장을 고스란히 수용한 발표문은 수용하기 어렵다. 특히 이런 강제징용 방안을 합리화하기 위해 정부가 부연한 마지막 두 문장은 대일 외교의 종속 심화를 보는 것 같아 더욱 우려된다.
독자들의 판단을 위해 ‘정부 입장 발표문’을 첨부한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정부입장 발표문>
ㅇ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구축되어 온 양국간의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ㅇ 또한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분들께서 오랜기간 동안 겪으신 고통과 아픔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고령의 피해자 및 유족분들의 아픔과 상처가 조속히 치유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ㅇ 2018년 10월과 11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규제가 발표되었습니다. 또한 2019년 8월 우리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통보하였습니다. 이어서 코로나19 발생 이후 인적교류 단절 등으로 경색된 한일관계는 사실상 방치되어 왔습니다.
ㅇ 이러한 상황에서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측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합리적 해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지난해 4차례의 민관협의회와 올해 1월 공개토론회, 외교장관의 피해자·유가족 직접 면담 등을 통해 피해자측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5차례의 한일 외교장관 회담 등 고위급을 포함한 양국 외교 당국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우리 입장을 충실히 전달하면서, 일본의 성의있는 호응을 촉구해 왔습니다.
ㅇ 정부는 이러한 국내적 의견 수렴 및 대일 협의 결과 등을 바탕으로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관련 다음과 같은 방안을 발표합니다.
ㅇ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 이후 설립된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이 강제징용 피해자․유족 지원 및 피해구제의 일환으로 2018년 대법원의 3건의 확정판결(2013다61381, 2013다67587, 2015 다45420) 원고분들께 판결금 및 지연이자를 지급할 예정입니다.
ㅇ 또한 동 재단은 현재 계류 중인 강제징용 관련 여타 소송이 원고 승소로확정될 경우, 동 판결금 및 지연이자 역시 원고분들께 지급할 예정입니다.
ㅇ 나아가 동 재단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하여 미래세대에 발전적으로 계승해 나가기 위해, 피해자 추모 및 교육·조사· 연구 사업 등을 더욱 내실화하고 확대해 나가기 위한 방안을 적극 추진할 계획입니다.
ㅇ 재원과 관련해서는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고, 향후 재단의 목적사업과 관련한 가용 재원을 더욱 확충해 나갈 것입니다.
ㅇ 정부는 한일 양국이 1998년 10월에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ㅇ 아울러, 정부는 최근 엄중한 한반도 및 지역․국제 정세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과 함께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과 지역 및 세계의 평화번영을 위해 노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