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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상의 세짜이야기] 링컨의 Three People
[김종상의 세짜이야기] 링컨의 Three People
  • jcy
  • 승인 2008.01.3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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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의 三民主義 - 장개석의 三分主義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재임 1861~1865년)의“Of the people(국민의)”, “By the people(국민에 의한)”, “For the people(국민을 위한)”이라는 게티즈버그 연설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해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민주주의의 요체를 간결하게 설명한 이“Three people”은 그 후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래 링컨대통령은 1809년 컨터기변경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년 정도의 단기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모든 지식은 스스로 독학해서 얻은 것이니 그렇게 위대하고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 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28세에 천신만고로 변호사가 되고 일리노이 주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임문하여 활동하다가 46세(1855년)에 그 당시 거물이었던 더그러스와 경쟁하여 연방의원에 당선되면서 전국적인 인물이 됐다고 한다.

1860년 뉴욕주지사까지 지낸 스워드 같은 또 다른 거물(차후 링컨대통령 정부의 국무장관이 됨)을 이기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당시 미국은 남북으로 분열되는 조짐이 있었는데 시골띠기에다가 경륜이 출중하지 않은 북부출신 링컨대통령을 깔보았는지 그의 취임을 전후해 남부의 몇 개주가 탈퇴하고 드디어 남북전쟁이 시작(1861년)됐다.

처음 전쟁의 분위기는 북부 쪽에 불리하게 돌아갔으나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1863년 1월 1일)하고 드디어 게티즈버그의 결전에서 북부 군이 승리(1863년 7월)한 것을 계기로 전쟁은 링컨의 주도로 마무리 하게 됐다.

게티즈버즈의 전투가 끝내고 그 곳을 국민묘지로 지정하면서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비서나 참모들이 연설문을 작성하는 등 여러 사람이 참여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 취임식 연설 같은 거창한 행사용이 아니었으므로, 링컨 자신이 메모를 하고 좋은 내용이 없을까, 그 날 아침까지 노심초사하는 과정에서 이 유명한 Three People의 명구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링컨은 1864년 재선이 됐고 결국 1965년 남부연합의 항복을 받았으나 아직도 아물지 않은 갈등으로 암살(1865년 4월) 당하고 말았는데, 자칫하면 분열될 뻔한 미국을 재통합(Unite)하고 미국의 산업자본주의를 꽃피게 한 위대한 대통령의 반열에 올라있다.

태평양을 건너 이렇게 거창한 일들이 벌어지고 민주ㆍ자본주의의 전통들이 무르익어 갈 때 우리나라는 어떠했는가?

실학사상등 조선의 중흥의 기운이 보이던 영ㆍ정조(1724~1800년)를 지나고 아쉽게도 외척을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한창이던 은둔의 세월(순조ㆍ헌종ㆍ철종 1800~1863년)로 일관한 것이다.

링컨의 명연설이 있었던 바로 1863년 이제 뭔가 개혁과 변화가 감지되던 고종(대원군)의 시대가 시작됐으나 이미 때가 늦었는지 중국ㆍ러시아ㆍ일본 등 열강에 둘러싸여 어려운 곡절들이 있었고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비슷한 시기, 중국도 서태후(1861년 수렴청정-1908년 사망)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면서 서구 열강(일본포함)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청조가 망하고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 이후 근대화로 나가던 중국의 역사 속에 손문(중국 이름 쑨원: 1866~1925년)이 등장한다.

그가 17개성의 대표들의 추대로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며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민주공화국 체제)를 수립할 때 내세운 국가의 지도 이념이 “삼민주의(三民主義)”였다.

삼민주의는“민족(民族)ㆍ민권(民權)ㆍ민생(民生)”주의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는 프랑스혁명(1789년)시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며 그 내용은 중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민족주의는 초기에는 청조(만주족)에 대한 한족(漢族)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나중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중화민족 중심사상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민권주의는 중국민중의 권리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중국적인 특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민생주의는 지권균등(地權均等)과 자본의 제한을 통하여 중국민중의 경제생활을 보호한다는 것이므로 자본주의 결함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사회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손문의 사후(1925년), 후계자(송경령ㆍ송미령 이라는 재색겸비의 자매들과 결혼으로 동서지간)처럼 평가 받은 장개석(1887~1975년 중국 이름 장제스)과 공산주의자 모택동(1893~1976년 중국 이름 마오쩌둥)과의 숙명적인 대결(북벌ㆍ국공합작 등)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일본과의 전쟁(1937년)까지 반발하여 복잡하게 얼켜 가다가 결국 모택동의 중국 인민공화국이 중국본토를 차지하고 장개석은 대만으로 밀려나기에 이르렀다.

장개석이 훨씬 우세한 여건ㆍ병력과 지원(미국의 마샬프랜 등)에 불구하고 중공군에 패퇴한 것은 안일하고 비현실적 전략 그리고 지휘부 및 군대의 부정ㆍ부패 등에 의한 것임을 자인하고 대만으로 후퇴한 이후에는 절치부심하고 본토의 수복과 경제 발전에 매진하였다.

이때 장개석 총통이 자유중국(대만정부)의 공직자들에게 제시한 윤리강령이 “三分主義”였다는 것인데, 이는 지분(知分), 즉 자신의 분수(分數)ㆍ입장을 잘 알고, 수분(守分)은 분수를 지키는 것이며 만분(滿分)은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자는 내용으로 공무원의 기강을 세우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아시아 국가에서는 싱가폴과 더불어 청렴한 공직사회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새로운 대통령을 선임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함에 있어, 예전의 어느때 처럼 대통령제가 5년 단임이니 한번 되면 그동안은“소신대로 간다.”가 아니라 링컨의 민주주의 철학이 국민을 의식(여론 청취)하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녹아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장개석의 삼분주의도 우리 공무원 사회에서 아직도 충분히 음미하여야 할 명제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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