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명지전문대학 교수

▲ 김현주 교수

언제부터인가 부잣집 출신을 뜻하는 영어 숙어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에서 유래한 유행어로 '금수저'가 나타났다. 부모의 재산과 환경에 따라 자식의 지위가 결정되고 이것을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비해서 부른다. 흙수저는 물려줄 것도 없도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에서 Thomas Piketty 교수는 경제성장률이 낮아지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과거의 축적된 부와 그렇게 얻는 수익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금수저는 대대로 금수저로 살아가고 흙수저는 대대로 흙수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민소득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경제성장률이 낮으면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개념이 더 두드러질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2000달러 이하 나라들(산출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은 이런 개념이 없다. 모두가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살아야 하는 빈민촌이 너무 많다. 세계 어디에나 빈민촌이 있지만 국민소득이 일정수준 이상이면 상대적 빈곤이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은 상대적 빈곤이 아닌 절대적 빈곤인 것이다.

몇 해 전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다. 당시 OECD에서는 에티오피아를 최빈국으로 분류했는데, 방문한 곳은 그중에서도 빈민촌이었다. 비가 오면 배수 시설이 없는 그 동네는 불어난 빗물에 발목이 빠져가며 다녀야 할 정도였다. 며칠 동안 안내를 했던 대학생이 있었다. 늘 밝은 표정으로 통역을 하고 안내 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어 그의 삶에 대해 알고 싶었다. 마지막 날 몇 몇 다른 학생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학생은 그가 안내했던 빈민촌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하루에 두 끼를 먹어보고 싶고 학교를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쓰레기를 줍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쪽방에서 꿈을 잃고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후원자가 생긴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풍족하지는 않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밥도 굶지 않게 된 것이다. 학교를 다니며 그에게는 꿈이 생겼다. 대학을 가기로 결정하고 에티오피아 최고의 국립대학인 아디스아바바대학교 토목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디스아바바대학교에서 그에게 유학을 제안했지만 그는 유학을 포기하고 공무원으로 취업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비가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그 길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꿈은 대학을 졸업하고 토목 관련 공무원이 돼 빈민가의 길을 새로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함께 나온 대학생들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다. 어떤 학생은 변호사가 돼 어려운 사람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고, 어떤 학생은 의사가 돼자신과 같이 가난한 동네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싶다고 한다.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뤄가고 있다. 그들로 인해 그들이 자라온 빈민가가 조금씩 변할 것을 기대한다. 꿈을 꾸고 꿈을 이뤄가고 있는 그들은 금수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풍요와 부를 물려받아 금수저가 아니라, 꿈을 꾸고 꿈을 이뤄가기 때문에 금수저로 변하는 것이다. 남을 위해 살아가려는 삶이 참된 금수저의 삶이 아닐까. 무엇이 그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남을 위해 살아가게 한 것일까? 아마도 작은 후원이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작은 나눔이 그들에게 꿈을 꾸게 하고 그들의 삶을 금수저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금수저가 아니라 꿈을 꾸고 꿈을 이뤄가는 삶이 금수저의 삶이라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꿈을 이뤄가는 우리의 젊은이들,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는 소중한 사람”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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