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명지전문대학 교수

▲ 김현주 교수

나눌 때에 행복하다. 나누는 삶이 복 받은 삶이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같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이 절대적 명제를 타자가 아닌 나에게 적용시켜 본다. 나눔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눔은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정말 좋은 부분이 많이 있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굶주리고 병들고 떠돌아 다녀야 했고 해외 원조를 받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는 어느덧 다른 나라를 원조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NGO도 많이 생겼다. 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원조를 할 수 있는 공여국이 된 것이다. 전쟁 이후 반세기도 되기 전에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나라는 없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공여국이 된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은 누군가를 돕거나 나눠 주는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국가 간 원조는 내가 내는 세금으로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돕고 나누는 것이 타자화되고 있다.

삶을 나누는 것을 타자가 아닌 자신이 주체가 돼 나누는 분들이 있다. 삶의 한 조각을 나누는 것이다. 삶의 작은 한 조각을 떼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다. 나의 것을 나눠 다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2015년에 에티오피아의 빈민촌을 방문했는데 동행한 분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평범한 주부이고 틈틈이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신다. 그분은 에티오피아의 빈민촌에 있는 아이들 3명을 후원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고 한다. 아이를 후원하기 위해 구두를 닦는 구두닦이 목사님의 이야기를 매스컴에서 보았다. 결혼식 비용을 아껴서 결혼 기념으로 후원금을 기탁한 신혼 부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남는 것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줄여서 남을 도와주는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는 가난의 고통으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이 있다. 배고픈 아이들, 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들, 생계를 위해서 쓰레기를 줍고 탄광에 들어가는 아이들, 마땅히 보호되고 꿈을 가지고 커야 할 아이들이 가난이라는 굴레 때문에 아이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잠시만이라도 눈을 감고 상상해보면 어떨까? 배고픈 아이가 음식을 받아들고 웃는 모습, 학교에 가고 싶었던 아이가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 생계를 위해 탄광에 들어가야 했던 아이가 친구들과 뛰어노는 모습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보인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이 아이들에게는 큰 행복을 선물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또 나의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주변에서 삶을 나눠 주는 모습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고무적인 것은 나눠 주는 모습들 속에 젊은이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여름방학에 인천공항에 가면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봉사활동을 하려고 해외로 나간다. 그 속에는 대학생들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검게 그을린 그들의 모습이 공항에 있다. 검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 속에는 행복으로 가득한 모습이 함께 보인다. 행복을 나누고 행복한 모습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가 밝아짐을 느낀다. 모든 대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한번쯤은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취업을 하면 힘들어하는 어린아이의 후원자가 되면 어떨까? 행복을 나눠 주는 특별한 여행이 우리 주변에 더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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