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중 동국대 교수(법대)

몇 년 전부터 ‘융합’이란 말이 대학가에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융합형 연구, 융합형 교육, 융합형 인재, 시스템 융합 등 어지간한 분야에 융합이란 낱말을 붙이면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상징하는 의미로 전환된다. 융합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종류의 것이 녹아서 서로 구별이 없게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 또는 그런 일”이다. 생물학에서 세포 간 접합이나 수정을 표현하는 뜻으로 사용되곤 한다. 융합은 영어로 ‘합침’을 뜻하는 Fusion 혹은 Integration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Convergence가 있다. 앞의 두 단어와 달리 Convergence는 두 개 이상의 물리적 존재가 합쳐서 다른 형태로 전환되는 (converging) 상황을 함축한다. 

하지만 융합의 의미는 거기서 끝이다. 융합이 학문 연구와 교육과 관련하여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지향성이 있어야한다. 그런 가치적 측면을 포괄하는 단어가 ‘통섭’이다. 통섭(consilience)은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이란 의미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비롯된 이 단어는 “현상을 큰 줄기로 잡는다”는 의미를 포괄한다. 학문 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통섭이란 “제 학문간 소통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융합 보다는 통섭이 좀 더 방향성과 가치지향성을 갖지만, 융합은 통섭의 기초이다. 

융합이나 통섭이 학문세계에서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그러한 접근이 학제 간(interdisciplinary) 연구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융합은 오늘날에만 중시되는 가치가 아니다. 인간이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융합은 학문 연구의 중요한 접근 방식으로서 그 위치를 상실한 적이 없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융합은 개별 전공 지식의 확립과 심화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융합이 전공 간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두 개 이상의 전공학문이 진지한 고민 없이 이합집산을 하면 그 결과는 변종 괴물이 될 수 있다. 그저 무늬만 늘어놓는다고 융합과 통섭이 될 수는 없다. 새로운 관점과 질서 속에서만 그 혼돈이 극복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도 그 안에 양자역학, 전자통신공학, 산업미술, 그리고 특허법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문지식이 융합된 형태로 응축돼 있지만, 이들이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독립된 형태로 존재하고 진화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융합과 통섭을 이루어내고 있다.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삶의 스타일인 속도와 응답성 그리고 이동성(mobile)이라는 특성을 잘 파악하고 거기에 세밀하고 구체적인 필요(needs)를 응집시켜 하나의 기계 속에 구현한 융합의 성공적 모델이다. 

융합은 개별 학문의 고유한 관점과 특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특성들을 창조적으로 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최근 대학에서 융합이라는 기치 아래 기존의 전공을 무시하거나 통폐합하려는 시도는 학문을 왜곡하고 대학의 존립 근거를 훼손한다. 이는 마치 앞을 보지 않고 옆만 보며 운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일부 대학에서 학문 단위 개편과 맞물려 전공 파괴 움직임까지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전공이 없는 교수는 없다. 한 전공에 천착하지 않고 잡다하게 많이 알고 있으면 마치 신지식인이 된 것 같지만, 결국 학문 장사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일찍 융합을 통한 학제 간 연구를 성공시킨 선진국의 대학에서도 아직 전통적 전공 영역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으며 당분간 그럴 기미도 없다. 

최근 한국의 유수 대학에서 융합 자체를 목표로 설립됐던 전략대학원, 융합대학원 등이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연구’라는 의미 속에 이미 융합적 방법론이 함축돼있기 때문이다. 대학 내 개별 연구실에서 이뤄지는 전공 지식 배양과 그를 기초로 하는 학제 간 연구는 프레임이 다르다. 융합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전공영역을 심화시키고 확충하면 그 단계에서 융합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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