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택(본지 논설위원 / 서경대 철학과 교수)

작년 초여름부터였다. 곳곳에서 들리던 4차 산업혁명이 철학을 인간 역사와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여기는 나에게도 프로젝트로 밀어닥쳤다. 그러면서 자료도 보고 세미나에도 가며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산업혁명의 추이와 뜻을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금융위기가 지속되던 2016년 초 슈밥이 말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어젠다가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이 아닐까 하며 지켜보고, 또한 로봇, 인공지능 등의 문헌도 살피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관련 2016년 12월의 <백악관 보고서>도 챙겨 보았다.

그곳에는 한마디로 열풍이 불고 있다. 보도는 쏟아지고 있으며, 정부나 교육계에서도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외침과 다짐이 이어진다. 특히 대학을 두고는 “대학교육과 산학협력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대학이 산업에 맞추어야 한다”,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대처해야 한다” 등으로 대학의 본질 및 역할과 관련한 논쟁적인 발언들이 4차 산업혁명이 주목을 받으며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4차 산업혁명은 현재 한국에서 거대 담론으로 이미 등극한 인상이다. 거기에 과학기술은 물론 중심 논제이며, 정부와 교육 분야도 이를 뒷받침하려 가세한다. 현재는 대선의 이슈로까지 부상해 있다.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의 4차 산업혁명 담론을 대하며 우리의 지난 한 세기가 떠오른다. 산업혁명에 국가가 앞장서 담을 쌓았던 19세기 말 조선, 그리고는 국가 주도로 ‘동양답게’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앞세우며 산업혁명에 동양 최초로 몰입한 일본으로 넘겨진 우리의 역사가 말이다. 철도를 놓고 발전소, 공장을 건설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대책 없이 이 땅에서 퇴장할 때 남은 것은 철도와 공장만은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낳은 이념 지형도 남긴다. 정신적 동양에 서양의 산업혁명과 그 산물이 이 식민지에 대책 없이 남은 것이다. 일본은 불충분하다.

18세기 말 시작된 산업혁명은 같은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진행되며 또한 19세기 초 과학혁명에서도 동력을 얻는다.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진행된 근대의 혁명은 자유주의를, 당시로는 자본가와 지식인만의 자유를 신분제 사회에 맞서서 실현한다. 그리고는 이에 대한 반발도 19세기 중반 사회주의로 나타난다. 이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충돌하는 이념이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등장한 셈이다. 이 대립은 한반도에 그대로 이식된다. 일본의 퇴장 뒤에 산업혁명의 직접적 결실은 없는 채 이념적 산물만이 이 땅에 뿌려진다. 그들의 공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데 지난 반세기가 흐르고, 이념의 대결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렇듯 산업혁명을, 나아가 4차 산업혁명을 우리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지켜보는 셈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들리는 외침과 구호는 절박한 실존적 목소리로 들린다. 산업혁명 그리고 과학혁명, 대혁명이라는 인류 사회의 새로운 흐름에 함께하지 못하고 타율적으로 공장은 세워지고 근대교육은 이식되며 우리 삶의 터전은 타자가 정해준 대로 분단된다. 그리고 해방 뒤 민주공화국도 20세기 초 세상의 변화에 사실상 편승해 수립된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현재의 드높은 목소리는 산업과 이념의 늦은 숙제를 하느라 우리가 치뤘던 그 심층적, 무의식적 고통의 정도에 비례하며 분출하는 셈이다. 산업혁명과 이의 산물인 정치사회의 근본적 변화에 대처하지 못한 증조, 고조 세대를 그래도 우리는 산업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반도체ㆍ철강ㆍ자동차ㆍ선박 등의 주요 산업부문에서 수위권 기업을 갖고 있다.

또한 식민, 분단, 전쟁 그리고 현재를 낳은 근본 이유도 우리는 짐작한다. 바로 산업혁명이다. 4차 산업혁명 열풍은 인공지능, 일자리 문제로만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우리의 안타까운 역사가 서려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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