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데올로기의 나라

한국은 이데올로기의 나라였다. 지도자나 정치가들도 이데올로기의 사도처럼 행동했다. 그 때문에 실천적인 정책보다 허황된 관념이 난무했다. 이런 사정은 조선왕조에서 더 심했는데, 지배세력의 성리학적인 경륜도 현실적으로는 그들의 부정부패로 백성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었다. 1800년대 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도 이념을 빙자한 권력투쟁이었다. 그러다보니 개화파의 일부는 뒷날 친일파로 전락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친청 사대주의자인 수구파 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1900년대 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식민지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성리학의 후예답게 마르크스주의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논의, 즉 ①마르크스 제국주의론에 의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설명 ②조선왕조를 봉건적인 아시아 전재론으로 파악하고 ③지주-소작농의 사회관계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매료 당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도 하나의 도그마였다. 민족의 독립은 노동자 농민의 계급투쟁에서 쟁취되어야 한다면서 지주를 비롯한 유산자 층에 대한 투쟁으로 민족사회의 분열로 나아갔다. 여기에다 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의 조국’으로 섬기는 등 모스크바에 대한 종속성은 심화시켰다.

2. 분단체제의 성격

식민통치기에 민족우파와 사회주의 좌파로 양분된 이념구도는 1945년의 해방 정국에도 이어졌다. 바로 1948년의 분단체제도 그 연장선상에서 비롯됐으며 이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에 맹종했던 지도자들이 자초한 결과라 해도 별로 틀리지 않는다.

실로 한국의 정치사회는 ‘이데올로기에 폭격 맞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주의자’라는 말이 유행했고 ‘~주의자의 허망한 공론이 지배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데올로기에 맹종했던 정치가들은 그것을 위해 때로는 민족도 버렸고 민족분단도 받아들였다. 이는 이데올로기로 강대국에 빌붙어서 권력을 잡으려했던 사대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결국 민족보다는 이념이 강조되었고 강대국에 종속적인 반 민족주자의 성격으로 달려갔다. 이것의 전형적인 모습을 북한 공산주의자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1947년에 소련의 힘을 빌려 공산주의 집권체제를 구축했으면서도 ‘남북협상’을 내거는 등 선전전을 펼쳤고 1950년 6월 25일에는 기습적인 남침으로 ‘온 민족을 살육의 골짜기’로 내모는 민족적 대반역을 저지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서슴없이 자행했다.

3.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한국에서는 지난 100여 년 간 민족 나름의 주체적인 이데올로기가 없었을까? 다른 나라에서는 그들 사회의 가치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선택 수용하는 이념의 자기화로 국가발전의 사상체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불행하게도 철저한 자기인식의 결여로 해외 이념에 추종하는 것이 민족적인 것처럼 설정되는, 그렇게 하면 할수록 민족적인 것에서 멀어지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나 서구 제국주의적 근대성의 수용이 민족사회를 위한 유일한 이념처럼 여겨졌다. 그 때문에 한편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유일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로 수용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그 결과는 한국을 위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한국이 되었으며 이점에서는 서구 근대성의 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이들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면 할수록 한편에서는 모스크바에 종속적으로 전락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워싱턴을 받들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도 전자의 논리는 좌파 이념의 한 줄기로 이어졌고 후자는 우파 논리의 하나로 결집되었다. 그리고는 양자 간에는 적대적인 대립관계로만 달려갔다. 이들 양자 사이를 타협시켜줄 기반적인 가교 역할을 맡을 민족적인 가치 관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좌우파의 이념은 결국 ‘타협할 수 없는 대결’로만 치달렸고 강대국의 이념적 식민화로 나아갔다. 결국 한국의 정치가들은 좌우파의 이데올로기의 선명한 깃발만 휘날리는 기수로 자처함으로써 민족적 현실 문제를 해결할 실천적인 지도자의 길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 진덕규 교수는 ...
이화여대 명예교수. 역사정치학자. 현재는 (재)한국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한국현대정치사서설>, <한국정치와 환상의 늪>, <권력과 지식인>, <민주주의의 황혼> 등이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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